[무역협상] 이번엔 비켜갔지만…'지도 반출' 불씨에 IT 업계 긴장 지속더팩트 기사제공: 2025-07-31 14:48:03

31일 발표된 한미 관세 협상 결과에 구글이 요청한 고정밀 지도 데이터는 포함되지 않았다. /남윤호 기자

[더팩트ㅣ조소현 기자] 한미 관세 협상에서 구글과 애플이 요청한 고정밀 지도 데이터 반출 문제가 의제로 다뤄지지 않으면서 산업계는 일단 안도하고 있다. 하지만 반출 여부를 최종 결정할 국토지리정보원(국지원) 협의체 심의 결과가 다음 달 11일까지 나올 예정이라, '진짜 고비는 남았다'는 긴장감도 여전하다.

31일 업계와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날 발표된 한미 관세 협상 결과에 고정밀 지도 데이터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브리핑에서 "이번 관세 협상은 통상 분야를 중심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지도 데이터 이슈는 다뤄지지 않았다"며 "향후 한미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가능성은 있다"고 밝혔다. 이어 "통상 위주의 논의가 급진전하면서 우리가 방어했고, 추가적인 양보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고정밀 지도 데이터는 1:5000 축척 수준으로, 건물 외곽선과 도로 폭, 골목길까지 정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 공간정보다. 군사·보안시설 위치가 포함될 가능성이 있어 고위험 정보로 분류되며, 국가 안보상 국외 반출이 엄격히 제한돼 있다.

구글과 애플은 현재 제공 가능한 1:2만5000 축척 지도로는 자사 내비게이션 서비스에 한계가 있다며, 정밀한 차량·도보 안내 서비스 제공과 외국인 관광객 편의 개선을 위해 고정밀 지도 데이터의 해외 가공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업계는 안보와 산업 전략이 얽힌 정밀 지도 이슈가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단 안도하는 분위기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도는 안보 자산"이라며 "정부가 '안보는 통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원칙을 지킨 것으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고정밀 지도 데이터 반출 이슈는 지난 3월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한국을 '위치기반 데이터 수출을 제한하는 유일한 주요 시장'으로 지목하며, 한미 통상 협상의 핵심 의제로 부상했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이번 협상에서 지도 데이터가 반출될 가능성을 우려해 왔다. 구글은 지난 2007년과 2016년에 이어, 올해 2월 세 번째 반출 신청을 제출했다. 애플도 지난달 두 번째 신청서를 냈다.

구글은 이번에 안보시설에 대한 블러(흐림) 처리와 보안 책임자 지정 등 조건을 제시하며 반출에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블러 처리를 하려면 정부가 군사·보안시설 좌표를 제공해야 해 정보 유출 우려는 남아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6일 서울 한남동 관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국토교통부 산하 국지원이 주관하는 '측량성과 국외 반출 협의체'는 구글이 신청한 고정밀 지도 데이터의 해외 반출 여부를 다음 달 11일까지 결정할 예정이다. 협의체에는 국토부를 비롯해 국방부, 외교부, 통일부, 국가정보원, 산업통상자원부, 행정안전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8개 부처가 참여하며, 각 부처는 안보와 산업, 외교적 영향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판단을 내릴 방침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번 관세 협상에서는 빠졌지만, 다음 달 협의체 심의 결과에 따라 상황이 바뀔 수 있다"며 "협의체가 현명한 결정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업계는 '조건부 허용'이나 '유료 반출' 시나리오에 대한 우려가 크다. 일각에서는 군사시설 블러 처리나 지도 사용 목적 투명화 등을 조건으로 제한적 반출을 허용하거나, 산업용 지도에 한해 유료로 제공하고 외국 기업이 직접 구매하는 방식 등이 거론돼 왔다. 지도 데이터를 레이어별로 나눠 민감 정보만 별도로 관리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업계 관계자는 "돈을 받고 데이터 반출을 허용하면, 안보와 직결될 수 있는 고정밀 지도 정보가 거래 대상처럼 인식되면서 정부가 향후 통제 수단을 잃을 수 있다"며 "외교 갈등이나 데이터 오남용이 발생하더라도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도 "군사시설, 주요 인프라 등이 포함된 지도 데이터는 악용될 경우 보안 위협이 될 수 있어, 해외 반출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이번 기회에 보다 근본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고정밀 지도 반출 요청은 20년 가까이 반복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명확한 기준과 제도는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이에 데이터 반출 기준의 법제화, 국내 서버 설치 의무화 등 구조적 개선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안규백 국방부 장관(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공간정보의 구축 및 관리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도 이같은 요구를 반영한 사례다. 개정안은 1:2만5000 이하 축척의 지도 반출을 제한하고, 반출 시 국내 데이터센터 설치 및 보안 조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sohyun@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