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투자하는 펀드만 3500억달러… 국내 산업계 득실은세계일보 기사제공: 2025-08-03 08:44:17

우리나라와 미국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타결한 한·미 무역협상에 따르면 반도체·배터리·바이오·원자력·핵심광물 등 전략산업 분야에 2000억달러 규모, 조선 협력 펀드에 1500억달러 규모로 총 3500억달러 수준의 대미 투자 펀드를 조성한다고 합의했다.
원화로 약 386조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향후 반도체와 의약품에도 품목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해뒀는데 우리나라는 이 경우 다른 나라보다 더 불리한 결과를 받지 않는 최혜국대우를 받기로도 합의했다.

상호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춘 데다 전반적으로 협상 내용이 선방했다는 평이 주를 이루는 상황에서 대미 투자 펀드 역시 국내 산업계에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 반응도 있다.
다만 현재 양국 합의가 큰 틀에서 윤곽을 잡은 정도라 앞으로의 숙제도 산적했다.

대미 수출 관세 인하와 조선업 투자를 골자로 한 한미 무역 협상이 타결된 지난달 31일 경남 거제시 아주동 주거단지 너머로 한화오션 거제사업장 대형 크레인이 보이고 있다. 뉴스1

◆“미국과의 조선 협력 펀드는 게임체인저”

우리나라가 미국과 조성하는 1500억달러 규모 조선협력 펀드를 두고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타결 직후 현지에서 브리핑을 통해 “이번 조선 협력 구조는 정말 ‘윈윈’이고 게임체인저”라고말했다.
미국이 조선업 재건에 관심이 높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여 본부장은 “일본과 유럽연합(EU) 협상이 타결되며 한국만이 할 수 있는 비교우위는 무엇일지 더 고민해 산업부와 대통령실이 긴밀히 협의하며 미국의 관심을 끌 구체적 제안서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마스가(MASGA)’라고 이름 붙여진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 탄생 배경이다.
여 본부장은 “우리 조선 산업이 이미 글로벌화됐지만, 여태까지 접근 안 됐던 넓은 미국 시장에 우리 기업이 명확하게 목적과 용도가 설계된 펀드로 투자·지원을 받으며 진출한단 건 굉장히 큰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글로벌경쟁전략연구단장은 “미국에 조선업이 사실상 없는 상황에서 이 투자금은 우리 기업이 미국 선박을 수주해 만들어줘야 하는 상황”이라며 “중장기적으로 우리 기업에 이익이 돌아오는 구조라 다른 투자와 성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김 단장은 “이런 부분을 고려하면 기존 EU나 일본 등 다른 나라보다 우리가 조금 더 유리한 방향이고 국익을 지키는 합의라고 본다”고 평했다.

◆모호성 남은 2000억달러 펀드, 국내에 득 돼야

조선 투자로 특정한 1500억달러를 제외한 2000억달러 규모의 대미투자 펀드도 조성한다.
전략산업 및 경제안보와 관련된 분야에 투자·대출·보증을 제공하기로 했다.
관련 산업계에서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한국원자력산업협회는 1일 입장문을 통해 “원자력 산업을 전략 산업에 포함한 대미 투자 펀드 조성에 511개 회원사는 환영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2050년까지 미국 원전 발전용량을 현재의 4배 수준으로 확대하기 위해 원전을 약 300기 추가 건설하겠다는 행정명령에 최근 서명했다.
협회는 “대미 투자 펀드가 국내 원전 기업의 미국 진출에 중요한 전환점이자 새로운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현재 미국에서 적극적으로 추진 중인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 및 건설 등 차세대 원전 기술 개발 협력과 글로벌 수출 확대를 위한 공조가 한층 강화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다만 2000억달러 펀드의 구성 방식과 용처, 수익 배분 방식 등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모호한 상태다.
여 본부장은 “새로운 형태의 펀드라 운용 과정에서 정해가야 할 점이 많다”며 “일본과 미국의 설명이 서로 다른 말 나오는 것처럼 저희도 미국과 완전한 안을 가지고 있지 않아 시간이 지나며 구체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 정부와 협상 자리에서도 대미 투자 펀드 규모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과의 최종 확정 금액보다 올렸다고 한다.
여 본부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마지막에 관여하지 않고 타결된 사례는 없다”며 “협상이란 게 그렇듯이 트럼프 대통령과 숫자 왔다갔다 하면서 최종 결과로 수렴했다”고 전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 로이터연합뉴스

협상 타결 이후 러트닉 장관은 엑스에 글을 올리고 “한국이 미국에 제공하는 3500억달러 수익의 90%는 미국민에게 간다”고 적었다.
대미 투자 수익의 양국 배분 비율을 이같이 밝힌 것인데 이 펀드 운용에 관련한 상세한 내용은 정해지지 않았단 것이 정부 설명이다.

허정 서강대 교수(경제학)는 “제일 잘한 것은 상호관세를 15%로 낮춘 것이지만 할 게 많아졌다”고 현재 협상 결과를 판단했다.
허 교수는 “수출이 판매대금이 국내로 들어와 영업이익이 국내에서 유지되는 방식이라면, 투자는 현지 법인을 설립해 사업을 진행하고 현지 법인 이익을 다시 국내에 투자해 이익이 된다”며 해외 자회사 수익이 국내로 돌아오는 ‘자본 리쇼어링’이 선진국형 투자라고 설명했다.
아직 산업별 투자 수익 배분 방식이 확정은 아니나 러트닉 장관 말대로 현지 법인 수익의 90%가 미국에 머물러야 한다면 국내 재투자 길은 막힌다고 허 교수는 우려했다.
그는 “소유주가 한국 기업이더라도 투자 수익의 90%가 미국 내에 있어야 해 자본 리쇼어링이 어려워지면 국내 투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그러면 국내 투자 활성화로는 이어지지 못하는 펀드가 된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이럴 경우 대미 투자 펀드 외에 기업이 진행하는 개별 투자라도 자본 리쇼어링이 활발해지도록 정부가 길을 터줘야 한다”며 “기업이 직접 투자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해외 투자 수익이 국내로 돌아오도록 필요한 정책을 만들고 규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미 관세 협상을 마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일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을 통해 귀국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미국과 관세 합의 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큰 틀에서의 합의는 마쳤지만 추후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추가 협의가 필요한 바, 끝까지 국익에 기반해 우리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며 산업·통상 수장으로서 의무를 완수할 의지를 보였다.
여 본부장은 “이번 타결로 대미 수출 불확실성은 어느 정도 해소됐지만, 글로벌 통상환경의 구조적 변화는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이에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유빈 기자 yb@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