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현주소에 대해 전문가들이 공통으로 지적한 것은 '낮은 생산성'이다.
같은 노동과 자본을 투입해도 과거보다 효율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거나, 더 적게 만들어내는 딜레마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런 비효율은 성장의 핵심 동력인 산업구조의 경직성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했다.
주력산업이 이미 성숙기에 접어들었지만, 구조개혁의 타이밍을 놓치고 시간을 흘려보낸 결과다.
전문가들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신산업으로의 자원 배분'이라고 강조했다.
이 중에는 서비스 산업도 포함된다.
이미 뒤처진 미국·중국 등 강대국과의 신산업 경쟁에서는 틈새시장을 공략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와 함께 투자 비용만 늘리는 연구개발(R&D)에서 벗어나 양질의 결과물로 기업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이를 위해선 고급인력을 키우고, 성과 중심의 보상체계 개편이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25일 설문조사에 참여한 산업 및 경제 연구기관·학계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은 주력산업이 성숙기에 진입하면서 기존 산업구조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한국 경제는 철강·석유화학·자동차·조선·반도체 등 5대 주력산업을 중심으로 과거 고도성장을 이뤘지만, 일제히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하락하며 경쟁력을 잃고 있다.
중국의 물량 공세에 뒤처진 것도 있지만 산업 사이클상 성숙기 또는 쇠퇴기에 진입했다.
성숙기에 진입한 업종은 아무리 인력과 투자를 많이 늘려도 얻을 수 있는 생산성 향상의 폭이 제한적이다.
문제는 주력 산업군 재조정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면서 성장 공백을 메울 신산업도 키워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이니셔티브(SGI)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10대 주력 수출품목은 20년째 변화가 없었다.
전문가들이 신산업으로 자본과 노동자원이 다시 배분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이유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진짜 성장'을 하려면 아낌없는 지원으로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신산업 육성을 위해 과학기술입국(科學技術立國·과학기술로 나라를 세운다) 정책을 재수립해야 한다"며 "새로운 산업구조에 맞게 정부는 과학기술연구소를 개편하고, 신산업에 대한 재정·조세·금융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양수 대한상의 SGI 원장 역시 "재정지원, 규제 완화 등에 있어 경쟁국 이상으로 지원한다는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동 서울대 공과전문대학원 교수는 "가장 우선돼야 할 것은 신산업 시도를 뒷받침하는 것"이라며 "산업·지역별로 아이디어를 스케일 업할 수 있는 인프라 허브를 구축하고, 혁신에 자금을 공급할 수 있도록 금융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서비스 산업 선진화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권남훈 산업연구원장은 "서비스 산업 생산성의 향상 없이는 성장과 불균형 해소, 양질의 고용 창출이 어렵다"며 "규제를 풀어 영세성의 탈피하는 것이 가장 유효한 전략"이라고 말했다.
인공지능(AI)과 바이오 등은 미래성장동력으로 꼽히며 이재명 정부에서도 대규모 지원이 예상된다.
하지만 이미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을 투입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이나 중국에는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들과 정면으로 맞붙기보다는 빠른 상용화와 응용 분야에서 사업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빠른 상용화를 무기로 시장을 선점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이 가진 세계적 수준의 제조 및 인프라를 활용해 적용 측면에서 빠른 상용화와 규제 테스트베드 전략을 추진하면, 글로벌 틈새 리더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얘기다.
정희수 하나금융경영연구소장은 "AI와 반도체, 헬스케어 등에서 세부 분야 틈새시장 집중 전략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일례로 전례가 없는 '빠른 고령화'를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 AI와 로봇기술을 바이오 헬스케어 분야에 융합하는 고부가가치 솔루션을 개발해 상용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이미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산업을 전략적으로 키워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김경진 세계경제연구원 부원장은 "한국이 강점을 나타내는 물류, 선박, 뷰티, 엔터테인먼트 등을 집중적으로 지원 육성해야 한다"며 "이 산업의 글로벌 파이를 키우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남훈 원장은 "민간기업들이 경쟁력 향상과 신사업 발굴에만 온전히 힘쓸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관련 인적자원과 연구개발 지원 등 인프라를 확충해야 한다"면서도 "국가가 너무 앞서가서 특정 분야에 과잉투자를 하는 등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경제 성장의 생산성을 높이는데 산업 재조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기업 자체의 생산성을 키우는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의 생산성 성장세는 2010년 이후 크게 둔화하고 있다.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R&D 지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4.1%로 2022년 기준 세계 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실제 기업 생산성 증가율은 2001~2010년 연평균 6.1%에서 2011~2020년 0.5%로 낮아졌다.
혁신의 양은 글로벌 상위권을 기록했으나, 생산성과 밀접한 질적 성장은 오히려 둔화한 것이다.
미국에 특허를 출원할 정도로 실적이 우수한 '혁신기업'의 생산성 증가율도 같은 기간 8.2%에서 1.3%로 크게 떨어졌다.
이는 국가경쟁력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은 지난해(20위) 대비 7단계 하락하며 69개국 중 27위를 기록했다.
순위를 끌어내린 것은 기업효율성이었다.
기업효율성은 21단계가 하락하며 지난해 23위에서 올해 44위를 기록했다.
이를 구성하는 요소인 생산성·노동시장·경영 관행 등 5개 전 분야에서 순위가 하락했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둔화한 기업생산성 흐름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기술혁신을 '똑똑하게' 촉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양수 원장은 "AI를 제조업과 서비스업 등 전 산업에 결합해 생산성을 크게 향상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초연구와 원천기술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도 필요하다.
기초연구를 강화하면 경제성장률이 0.2% 개선된다는 한은의 시나리오 분석 결과도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투자를 공격적으로 늘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양질의 연구개발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술 투자가 산업생산으로 연계되지 않고 있다.
성과가 날 수 없는 구조가 문제의 본질"이라며 "혁신 투자의 성과가 상용화를 통해 실제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도록 규제 환경을 개선하고, R&D 투자정책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성과 중심의 노동시장을 개혁하고, 고급인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성과급 중심의 보상체계, 고용유연성 제고 등 노동시장을 개혁하면서 동시에 실업급여 현실화를 통해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며 "결과적으로 국가부담이 커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인실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장은 "가장 우선돼야 할 것은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자율성을 확대하는 것"이라며 "대기업과 공기업은 기존의 연공서열 중심에서 업무 중심, 성과급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설문에 참여해주신 분(가나다 순)
김혜민 기자 hmi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